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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과 수치의 자리에서 건져주심
창 12:14~ 13:4
어떤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풀어야 한다. 그러게 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내가 반응하는 모습이 내 현 주소이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모습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래서 평상시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약1:2 여러가지 시험을 만날 때 기쁘게 여기라... 시험은 반드시 있다. 그 때 기쁘게 여겨야 한다. 시험을 당할 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난감할 때, 나를 도와 줄 이가 없을 때... 하나님께 구하라! 구할 대상이 있다. 아침에 해가 뜨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시험도 당연하다. 그 시험이 올 때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의 내면이 정돈되기 때문이다. 다윗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을 때 안정적으로 살았다.
[삼하2: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없으면 무절제하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죽이기까지 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역안에 머무르도록 기도해야 한다.
[창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아브라함은 기근이 왔을 때 자기의 방식대로 풀었다. 그랬더니 두 가지 일이 생겼다. 두려움과 거짓이 생겼다. 이렇게 확연한 문제 말고도 스물스물 올라오는 악한 것이 있다. 그 예를 12:13에서 볼 수 있다.
[창12: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안전하다=야타브/ 잘 되다. 안전하다는 뜻이다.
[창12:13, 새번역]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
우리는 목숨만 생각하지만, 원어적으로 보면 대접을 잘 받는 이유가 있다. 아내를 이용하려는 이기적인 태도가 올라오는 것이다. 실제로 16절에 보면 아내를 이용해서 잘 살게 된다.
[창12: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왜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나? 아브라함이 얻은 이유가 그로 말미암아... 두려움과 거짓 뿐 아니라 이기심이 있다. 우리에게 탐욕적인 생각이 올라온다면 적신호이다. 일만성도파송운동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이익인가? 생각한다면 생각해야 한다. 내가 과연 하나님의 통치아래에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내면을 점검해야 한다. 내적인 것 외에도 외적인 부작용이 있다.
1. 복의 통로가 아니라 타인에게 재앙을 초래한다.
[창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실지라... 복이 되라고 하셨는데, 아브라함 때문에 재앙이 임했다.
2. 이방인에게 꾸지람을 듣는 비참한 수치를 당한다.
[창12:18, 새번역]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꾸짖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이렇게 대하느냐? 저 여인이 너의 아내라고,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 세 번에 걸쳐 말한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의 반응이 없다. 유구무언이다. 요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 선장이 요나를 꾸짖는다.
[욘1:6, 새번역] 마침 선장이 그에게 와서, 그를 보고 소리를 쳤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잠을 자고 있다니! 일어나서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라도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준다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이 것이 지금 이 시대...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지금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목사가 잘못한 것도 죄지만, 목사가 무능한 상태, 잠자고 있는 것도 추궁해야 할 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이탈하면 믿음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도 세상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유구무언이 된다. 그 절망적인 순간이 어쩌면 가장 회복이 가까이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
자기 힘으로 수습할 수 없는 유구무언에서 어떻게 회복되나? 두 가지 조건이 있다.
1. 先: 하나님의 개입하심.
[창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만약 재앙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불평이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하나님 때문에 부끄러움 당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이다.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롬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으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수치를 당한다고 해도. 아브라함에게는 평생의 치욕이 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망설임 없이 개입하신다. [창12: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무너짐 다음에 회복이 있다. 창조 이전의 세계는 혼란과 혼돈이다. 하나님이 임하심으로 질서가 임한다. 수치로 몰고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위장된 평화 속에 살면 결정적인 순간에 미끌어진다.
2. 後 : 초심의 회복
우리가 당하는 징계가 우리를 들어서 다시 옮기시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개입이 느껴지면 4절로 가야 한다. [창13: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시34: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지렁이 같은 인생이라도 회복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렘33:2-3]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기도할 때 우리가 꿈도 꾸지 못했던 하나님의 방법이, 하나님의 대안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